SEOUL NATIONAL UNIVERSITY
검색창 닫기

1945년 해방을 계기로 경성제대가 경성대학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문학부 소속의 어문학 전공학생들이 경성대학 이름으로 첫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 독문학을 전공한 유일한 졸업생이 한남구(韓南龜) 선생이었다. 한남구 선생은 일본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경성대학에서 졸업장을 받게 되어, 독문학을 전공한 경성대학 졸업생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셈이다. 이듬해인 1946년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공포되어 경성대학은 대학원 외에 9개 단과대학(문리대, 법대, 공대, 의대, 농대, 상대, 치대, 사범대, 예술대)을 포함하는 국립 서울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이때 비로소 독어독문학과도 독립된 학과로 처음 설치되었다.

그러나 독어독문학과 개설 당시에는 학과를 운영할 전임 교수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철학과의 박종홍(朴鍾鴻) 선생이 독어독문학과의 학과장 대리를 겸하다가 일본의 동경대학 독문과를 졸업한 김삼규(金三奎) 선생이 독어독문학과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렇지만 김삼규 선생은 얼마 안 있어 동아일보 주필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독문학과에서 강의한 전임 교수로는 일본 법정대(法政大) 독문과 출신인 김진섭(金晋燮), 이회영(李檜永) 선생, 경성대학 출신인 한남구 선생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황주봉(黃朱鳳) 선생이 독문과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독문과 초창기에 해당하는 1-2년 동안의 재학생은 대개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학생들이었다. 학생의 수는 문리과대학 내의 여타학과들에 비해 적었다. 학과의 학생수가 적었던 이유에는 2차대전 패전국으로서의 독일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졸업생들의 수를 보아도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제 1회 졸업생 중에는 독문과를 졸업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의 상지대학(常智大學)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다가 문리과대학으로 편입한 곽복록(郭福祿) 선생이 1948년에 처음으로 독문과를 졸업했다. 이어서 1949년에 이영배(李永培) 선생이 독문과를 혼자서 졸업했으니까 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의 4년간 3명의 졸업생이 있었던 셈이다. 초창기 독문과가 중심이 되었던 행사로 기억할 만한 일은, 1949년에 있었던 詩聖 괴테의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였다. 당시의 독문과 재학생들과 독일문학 및 독일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졌던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6 25 전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학과가 없겠지만 특히 독문과는 큰 시련을 당했다. 1951년 강두식(姜斗植) 선생이 단신 졸업하게 되었고, 1952년에 또다시 지명렬(池明烈) 선생이 혼자 졸업한 사실만 보아도 당시 학과가 처한 어려움과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환도 후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교수의 부족으로 요즈음과 같은 강의진행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또한 경성제대 시기에 확보되어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독문학 서적들이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분실되어 전공서적조차 구하기 힘들어서 그야말로 황무지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1954년에는 독문학과의 졸업생이 5명이 되었고, 국립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독문학연구를 위한 독일정부 장학금이 한국에도 할당되었다. 바로 독일학술교류처(Deutscher Akademischer Austausch-Dienst) 장학금이었다. 1955년 강두식 선생이 DAAD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 후 지명렬, 신태호(申泰浩), 송동준(宋東準), 허창운(許昌雲) 선생 등 많은 교수들이 DAAD 장학생으로 서독에서 독문학을 연구했다. 훔볼트(Humboldt) 장학금과 더불어 DAAD 장학금은 당시 우리나라 독문학계의 소생을 위해서 문자 그대로 사막의 옹달샘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학과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독일 유학생들이 전후의 새로운 학문경향을 습득한 후 새로운 자료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1956년 허형근(許亨根) 선생이 전임으로 부임하여 독일고전주의 강의를 주로 했고, 1959년에는 재학생 및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한국독어독문학회가 발족되어 학회지 {獨逸文學}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독일문학 작품의 번역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1959년은 쉴러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서울대학교 대강당에서 쉴러 강연회를 가졌다. 당시 연사는 정찬조(鄭澯朝), 서항석(徐恒錫), 김정진(金晸鎭), 허형근 선생 등이었다. 또한 독문학과 후원으로 서울대학교 연극부가 원각사에서 쉴러의 {군도(群盜)}를 공연했다.

1960년대는 학과의 발전을 위한 제반 조건이 갖추어진 시기였다. 곽복록 선생이 서독의 뷔르츠부르크(W rzburg) 대학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문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귀국하여 1964년 서울대학에 부임하였고, 1963년에는 처음으로 DAAD파견 독일인 강사가 독문과에 부임하였다. 1965년에는 당시 서독 하원의장이었던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Eugen Gerstenmeier) 박사가 1천여 권의 독문학 서적을 독문학과에 기증함으로써, 연구활성화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이 개설되어 문화원의 주선으로 독일과의 학문적 교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1967년 독일 자르브뤼켄(Saarbr cken) 대학의 에거스(H. Eggers) 교수를 초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독일어’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했고, 이어 1968년에는 자유베를린 대학의 렘머트(E. L mmert) 교수가 서울대학교에서 ‘토마스 만의 초기소설 기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이래로 본(Bonn) 대학의 알레만(B. Allemann), 콘스탄츠(Konstanz) 대학의 프라이젠단츠(W. Preisendanz) 교수 등 거의 해마다 독일의 저명한 독문학자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독일 교수들의 초청강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우리나라 독어독문학 연구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1960년대 말에는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출신으로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이 무렵 독일 희곡작품이 독문학과 학생들에 의해 몇 차례 공연되었다. 1968년에는 페터 봐이스(Peter Weiss)의 {마라의 박해와 죽음}이, 1969년에는 뒤렌마트(Friedrich D rrenmatt)의 {미시시피씨의 결혼}이 공연되었으며, 또한 막스 프리쉬 Max Frisch의 {필립 호츠의 위대한 분노}를 처음으로 독일어 대본을 그대로 사용하여 공연한 것도 이때였다. 특히 이들 작품의 공연은 서사극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교내외에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 진입하면서부터 특히 새로웠던 현상은 대학원의 운영이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전국의 대학에 독어독문학과나 독어교육과 혹은 독일학과 등 다양한 명칭의 학과들이 한꺼번에 신설됨에 따라 전문적인 교수인력의 수요가 급증하였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전국의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강의하는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출신의 교수의 숫자는 강사를 포함하여 약 130여 명이다. 여기에다가 본교의 대학원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만을 졸업한, 학부의 출신이 다른 교수들의 인원까지 추산하면 그 수는 훨씬 커진다.

경성제대와 경성대학를 거쳐, 서울 문리대로 개편되어 오는 과정에서도 한결같이 지켜오던 동숭동의 정든 교사와 마로니에 교정을 버리고 1975년 서울대가 현재의 관악산 캠퍼스로 옮겨오면서부터 독어독문학과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문리대 독문학과와 교양과정부 독일어과가 합치게 됨으로써, 전임교수의 수가 5명에서 15명으로 늘어났다. 1980년까지만 해도 학부의 독어독문학과 정원은 20명에 머물렀지만 81년부터 3배로 팽창하였다. 물론 이 숫자는 85년에 와서 40명, 86년에는 30명으로 감축되어 현재의 정원으로 머물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대학원의 학생수도 늘어났다. 2000년 1학기 현재 학부의 재학생 총수는 134명이고, 대학원 석사과정에는 27명, 박사과정에는 24명이 재학중이다. 2000년 8월말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학생의 수는 모두 1142명에 이른다. 2000년 8월 현재까지 본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모두 70명이고, 석사과정 졸업생은 총 318명이다.
반세기의 연령을 맞으면서 독문과에서는 정년을 마치시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허형근 선생이 1982년에 은퇴하신 후 1991년에는 지명렬 선생, 1992년에는 강두식 선생, 1993년에는 이병찬(李炳燦) 선생, 1994년에는 천기태(千冀泰) 선생, 그리고 최근 2000년 2월과 8월에는 송동준 선생과 김석도 선생이 각각 은퇴하셨다. 그러나 고창범(高昌範) 교수와 이갑규(李甲圭) 교수는 애석하게도 병환으로 1990년과 1995년에 타계하셨다. 이렇게 1세대 독문과 교수들의 뒤를 이어 1960년대에 입학하거나 졸업했던 제 2세대 교수들이 본과에 부임하기 시작하였다. 황윤석(黃允錫), 신수송(申琇松), 안삼환(安三煥), 임종대(林宗大), 임한순(任漢淳) 선생이 1세대 교수들에게 직접 강의를 들은 제자 세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문과는 두 가지 숙원사업을 성사시켰다. 강의 등을 포함한 학과중심의 제반 행사를 뒷받침하고 연구분위기를 가일층 조성하여 학문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그간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준비작업을 해온 <독일학연구소>의 창립과 독어독문학과 총동창회의 결성이 그것이다. 1990년 1월에 창립된 <독일학연구소>는 강두식 선생이 초대 연구소장(90. 2 – 91. 9)을 맡은 이래 박환덕 선생(91. 9 – 93. 9), 송동준 선생(93. 9 – 95. 9), 안삼환 선생(95. 9 – 97. 8), 임종대 선생(97. 9 – 98. 12), 임한순 선생(99. 1 – 99. 12)이 소장으로 재임하였고, 현재 연구소장은 안삼환 선생(20. 1 – 현재)이 맡고 있다. <독일학연구소>는 해마다 국내외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세미나와 강연회를 개최하여 그 결과물을 매년 {독일학연구}지로 묶어 출판하고 있으며, 2000년 현재 제9집까지 발간되었다. 독어독문학과 동창회는 1995년 5월 26일 서울 삼성동 소재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이미 정년퇴임을 하신 각 대학 독문과 명예교수들을 비롯한 본과 교수들 등이 참석하여 모교와의 유대강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정리: 송동준, 임종대 명예교수)

수정요청

현재 페이지에 대한 의견이나 수정요청을 관리자에게 보내실 수 있습니다.
아래의 빈 칸에 내용을 간단히 작성해주세요.

닫기